밀린 잡무를 파티처럼? 미루기 끝판왕들을 위한 '어드민 나이트’
안녕하세요, 시티호퍼스 뉴욕 마스터예요.
미국에는 ‘어덜팅(Adulting)’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세금이나 공과금 납부, 요리나 청소, 복잡한 서류 작성 등 어른이라면 마땅히 해내야 할 귀찮은 일들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행위를 뜻해요.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자면 ‘어른 노릇’이라 할 수 있죠.
문제는 이 당연해 보이는 ‘어른 노릇’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에선 바쁜 일상 속에서 어른 노릇까지 하는 데 압박감이나 지루함을 느끼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어요. 심지어 어덜팅의 기초를 하나, 하나 알려주는 ‘어덜팅 101’ 강좌나 콘텐츠까지 등장했을 정도죠.
그런데 최근 미국 Z세대가 이 지루한 행정 업무를 파티처럼 즐기고 있어요. 이른바 어드민 나이트(Admin night), 행정 업무의 밤을 통해서요. 혼자라면 스트레스였을 잡무들은 오히려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 유쾌한 명분이 되었고, 번거로운 업무 처리 관련 꿀팁은 대화 소재로 자리잡았죠.
이런 기발한 발상이 트렌드로 자리 잡은 데엔 틱톡의 한 영상이 미친 영향이 컸어요. 틱톡 팔로워 약 7만 명을 보유한 크리에이터 벤 칩먼이 올린 영상이었는데요. 영상 속 그는 매주 화요일마다 친구를 만나 밀린 행정 업무를 함께 처리하는 루틴을 가졌더니 ‘인생이 달라졌다’고 고백해 많은 관심을 받았어요.
“어드민 나이트는 실제로 저의 인생을 바꿨어요. 그동안 ‘나중에 하지 뭐’, ‘언젠가는 하겠지’ 라며 계속 미뤄왔던 일들을 이제는 ‘화요일에 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크리에이터, 벤 칩맨
2025년 12월에 게시된 이 짧은 영상은 한 달여 만에 조회수 140만 회, 공유 3만 6,900회를 돌파하며 ‘대박’이 났어요.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공감을 받으며 미국 Z세대들의 알고리즘을 빠르게 점령했죠.
흥미로운 점은 영상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단순히 ‘좋아요’를 누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친구들과 모여 어드민 나이트를 갖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덕분에 최근 한 달 사이 틱톡에는 편안한 차림으로 모여 각자의 노트북을 펼친 채 업무에 몰입하는 사진이나 영상, 어드민 나이트 경험담과 꿀팁, 들으면 좋은 플레이리스트 등까지 관련 영상들이 빠르게 올라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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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잡무를 위해 굳이 모인다는 게 의아하다고요? 하지만 알고 보면 이건 영리한 전략이에요. 타인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올라가는 ‘바디 더블링(Body Doubling)’ 효과를 기대할 수 있거든요.
본래 바디 더블링은 ADHD 환자나 쉽게 산만해지는 사람들의 집중을 돕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어요. 누군가 곁에 있다는 감각이 뇌를 적절히 각성시켜 딴짓을 하려는 마음을 다잡아주기 때문이죠. 캘리포니아 주립대 즈비 벨린 박사는 “시작에는 큰 에너지가 들지만, 일단 발을 떼면 추진력이 생겨 지속하기 훨씬 쉬워진다”고 설명하는데요. 그러니 어드민 나이트는 혼자서는 넘기 힘든 시작의 문턱을 함께 넘게 해주는 장치인 셈이에요.
함께함으로써 얻는 정서적 위안도 커요. 어드민 나이트에서는 혼자라면 막막했을 과제를 함께 처리하며 ‘어덜팅’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어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안도감을 느끼고요. 서로의 생활 꿀팁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죠.
나아가, 어드민 나이트는 고물가 시대에 맞는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사교 활동이기도 해요. 불황이 지속될수록 화려하게 차려입고 큰돈을 써야 하는 모임은 부담스럽기 마련인데요. 어드민 나이트는 그저 편안한 차림으로 모여 각자의 과업에 몰입하며 가벼운 수다를 즐기면 그만이에요. 게다가 밀린 고지서를 정리하거나 불필요한 구독 서비스를 해지하며 소소하고도 확실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죠. 실용과 효율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 Z세대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예요.
이런 흐름은 비즈니스에도 빠르게 반영되고 있어요. 바와 레스토랑은 퇴근 후 술 한 잔으로 업무의 피로를 씻어낼 수 있게 ‘해피 아워(Happy Hour)’ 제도를 운영해 매출을 올리곤 했는데요. 이제는 단순히 술을 마시러 오는 사람보다, 노트북을 펼치고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을 새로운 고객층으로 맞이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죠.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바, 로그라이크 태번은 최근 어드민 나이트처럼 할 일을 해치워 버리자는 ‘두 어 띵 데이(Do-a-Thing day)’를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카페나 바 못지 않게 호텔도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어요. 소음은 피하면서도 집보다 높은 집중력을 원하는 이들이 아예 호텔 방을 잡아 어드민 나이트를 즐기기 시작했거든요. 이에 맞춰 몇몇 호텔들은 내부 인테리어를 아예 어드민 나이트에 최적화된 형태로 바꾸고 있어요. 투숙객들이 함께 작업할 수 있도록 커다란 공용 테이블을 배치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아예 어드민 나이트를 테마로 이벤트를 연 레스토랑도 있었는데요. 보스턴 옴니 호텔의 레스토랑, 케스트라예요. 이곳은 개인 혹은 단체가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건 물론, 마감일을 테마로 한 위트 있는 칵테일 ‘인박스 제로 마티니’와 ‘던 앤 더스티스 올드 패션드’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어요. 인박스 제로(Inbox zero)는 쌓인 메일을 모두 읽어 새 메일이 0인 상태인 메일함을 뜻하고요. 던 앤 더스티스는 완전히 끝내고 마무리까지 다 했다는 뜻의 영어 관용구 ‘던 앤 더스티드(Done and Dusted)’에서 따온 거예요.
지루한 잡무를 힙한 놀이로 바꾼 어드민 나이트는, 미국 Z세대가 소모적인 외출보다 삶을 정돈하고 돌보는 것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요. CNN은 어드민 나이트가 새로운 독서 모임이 될 거라고 보기도 했죠. 책 대신 각자의 일상을 주제 삼아 모이는 어드민 나이트가 많은 사랑을 받는 사교 활동으로 자리 잡을 거라면서 말이에요.
혹시 지금 메일함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나 미뤄둔 공과금 고지서 때문에 마음이 무겁진 않나요? 그렇다면 친구에게 어드민 나이트를 제안해 보는 건 어떨까요? 혼자라면 막막했을 숙제들도, 함께라면 꽤 재미있는 파티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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